책 읽는 여자

[노자 :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김홍경, 들녘

꽃쉰 2020. 9. 9. 09:01

세상이 참으로 소란스럽다. 이 소란스러운 정국을 지나며 늙은이의 노래라는 키워드는 심장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 잔잔한 울림을 이끌어 냈다. 상황이 엮어 가는 많은 소음들 속에 옛 선인은 과연 어떠한 삶의 기술을 풀어 낼 찌 자못 궁금해졌다. 고도로 개인화된 현대를 사는 나는 그 옛날 노래 소리를 따라 오얏나무 아래로 걸어가 백발의 노인을 만나 보기로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얼마나, 어떤 원칙으로 이 시대를 읽어 낼 것인가를 생각하기로 하고 겁도 없이 900페이지에 가까운 들녘 출판, 김홍경의 노자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를 펼친다.

서문

노자는 작은 책이자 큰 책이다. 잇따른 고고학의 발굴로 인해 중국학은 꽃을 피우게 되고,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의미를 품은 것이 마왕퇴 한묘의 백서와 곽점 초묘의 죽간, 즉 초간이다. 저자는 이 발굴을 기점으로 또 하나의 특별한 노자를 찾게 된다. 모두 노자와 관련된 자료가 포함 된 이 발굴은 마왕퇴 백서의 완전한 노자갑본과 곽점 초간의 노자자료를 기본으로 하고서 기타 통행본을 매우 치밀하게 비교, 참조해가며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것이며 원래의 노자에 비해 상당히 두꺼워 졌다. 이미 동.서양의 많은 번역본이 있으나 김홍경은 그 많은 번역본에서 다룬 신비주의나 형이상학을 내세운 도덕경이 아니라 삶의 기술(처세술), 통치론(제왕학)으로서의 노자를 소개한다.

 

이 책의 노자는 기존의 노자와는 다르게 도덕편 체제가 아닌 덕편도편보다 앞에 두었다. 여기서 판단하건대 이 책은 통행본으로 알려진 왕필(王弼)본이 아닌, 마왕퇴 백서(帛書) 갑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1993년 중국 호북성 형주 근교의 곽점에서 발견된 초간(楚簡)본을 중요 자료로서 반영한다. , 이 책은 두 차례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의 덕분으로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여 만들어냈다 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을 다시 불러내고 그 일들의 또 다른 시선을 제시함에 있어서도 매우 설득력 있는 이면의 논증들을 제시함으로써 같은 역사적 사실 속에 굳어 있던 프레임을 제거하게 하고 새롭고 신선한 안목을 제시함에 있어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노자를 해석한다.

예를 들어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에서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서 학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는 분서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박사관을 두어 선왕의 정전(政典)과 제자서(諸子書)를 모두 가르치고 있어 고전이 그대로 보존된 상황이라던가, 한무제의 사상 통제와 유가의 당대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세워야 했던 상황과 조작이 필요했던 일이나 장단점이 존재했던 작업들에 대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중국 학자들의 중화주의 사상과 서양 학자들의 숨어 있는 상업주의도 함께 고발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학설에 반하는 독창적인 견해임에 틀림이 없다.

 

 

김홍경은 노자를 제왕학이이자 처세학, 즉 생존을 위한 지침서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연히 신비주의나 과도한 도의 형이상학과 혹은 도교적 양생 수양술 등은 제거되어 있다.

게다가 그는 노자는 도가를 분류하기 전에는 잡가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 사상을 종합적으로 편집한 늙은 선생(老子)의 지혜서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도덕경이라는 이름 대신 노자임을 강조한다. 고전에서 이 책을 지칭하면서 가장 먼저 사용한 이름이 노자다. ‘노자라는 말의 의미는 여러 설이 있으나 나는 늙은 선생이라는 설을 지지한다. 이 설은 정현에게서 온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책에 새로운 제목을 붙인다면 늙은이의 노래라고 하고 싶다. 노자의 정서가 그렇다.(p65)

 

덕편(德篇)

 

뛰어난 덕은 덕에 마음을 두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덕이 있고

하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하니 이 때문에 덕이 없다.

뛰어난 덕은 무위하며 또 그렇게 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뛰어난 인은 사랑하지만 그렇게 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뛰어난 의는 의를 행하면서 그렇게 하여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

뛰어난 예는 예를 따르면서

사람이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고 사람을 잡아당긴다

그러므로 도를 잃는다

도를 잃은 이후에 덕이고

덕을 잃은 이후에 인이고

인을 잃은 이후에 의고

의를 잃은 이후에 예다

무릇 예는 건실함과 믿음이 옅은 것이니 어지러움의 싹이다

미리 아는 것은 도의 헛된 꽃이니 어리석음의 싹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는 두터운 곳에 머물지 옅은 곳에 머물지 않으며

열매에 머물지 꽃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无德. 上德无爲而无以爲也, 上仁爲之而无以爲也, 上義爲之而有以爲也, 上禮爲之而莫之應也, 則攘臂而扔之. 故失道. 失道矣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也, 而亂之首也. 前識者, 道之華也, 而愚之首也. 是以大丈夫居其厚, 而不居其薄, 居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38) (p70~71)

 

이 글에서 노자의 말하는 방법에 대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정언약반(正言若反)이라고 하며 올바른 말은 마치 비딱한 듯하다는 뜻으로, 이런 방법은 노자의 전편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유세법은 기본적으로 도전이므로 도전할 대상을 전제하는데 노자가 도전한 것은 두 학파, 유가와 묵가이다. 이러한 유세법은 나중에 명가(名家)라 불리는 사상가들이 이런 형식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노자의 덕은 독립적이기보다는 도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덕을 이해하려면 도를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노자는 도를 표현할 때 언제나 시적인 모호함과 철학적 추상성을 동원한다. 이로써 노자의 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너무나 대단하고 잘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 이유는 자신의 길이 유.묵의 길과 다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더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이다. 노자는 이론적으로 를 담보하지만 정감에 호소할 때는 덕의 공리성과 실용성이 더 큰 역할을 한다.

아울러 지금껏 통행되어왔던 노자와는 상당히 차별화 된다. 형이상학적인 도편보다 덕편을 앞세운 것은 그 시대의 노자가 통치술(처세술)을 중심에 내세우는 잡가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 핵심 목표는 장생구시를 위한 무위의 통치술, 즉 위험이 없는 장구한 생존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생구시는 안온하고 장구한 개인적 삶을 가리킬 수도 있고, 몰락 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적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방향이 한 데 얽혀 있는 것은 노자를 비롯한 중국 고대 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잘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잘 간직한 것은 달아나지 않으니 자자손손 제사가 끊기지 않을 것이다

善建者不拔, 善保者不脫, 子孫以祭祀不絶(54) (p258)

 

이 구절에서 우리는 장생구시의 함의를 읽어낼 수 있다. ‘자손만대 제사가 끊기지 않는 것이다. 노자59장에는 휜 뿌리는 깊고 곧은 뿌리는 단단하다고 하니 장생구시의 길이다라는 말 또한 정치적 함의를 만날 수가 있다. 깊은 뿌리를 간직하려는 이유는 뽑히지 않기 위해서다. 장생구시의 방법론을 이야기 한 것이다. 여기서 휘었다는 것은 결코 좋아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 뽑히지도 않는 뿌리인 것이다. , ‘무위정치는 수단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편(道篇)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1) (p512)

 

노자는 여기서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라고 정의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은 규정짓고 한정짓는다. 도는 한정되지도 규정되지도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깨달음은 문자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원한 것은 형식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없는 내용도 있을 수가 없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 형식이 없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이니

바퀴통 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니

그릇 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있다

방을 만들 때는 방문과 창문을 뚫으니

방문과 창문 안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방의 쓸모가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로운 것은 없음이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輻同一轂, 當其无, 有車之用也. 埏埴以爲器, 當其无, 有埴器之用也.

鑿戶牖, 當其无, 有室之用也. 故有之以爲利, 无之以爲用(11) (p634)

 

노자는 비어 있는 것을 이롭다 말하고 쓰임을 위해 비어 있기를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것이 비록 비어 있는 것을 뜻한다 해서 있는 것을 무익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빈 그릇이란 그릇을 전제하고 비어 있는 바퀴통 또한, 바퀴통을 전제로 한다.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있는 것 보다 본질이란 것을 의미하고 있다. 내용을 담는 그릇이 목적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목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필원의 해석으로 한다면 가 서로 의존하여 수레의 쓰임을 낳는다. 유무상생의 변증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호의존의 독법보다는 보다 의 가치를 더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엇인가 얻으려면 비워야 함을 알게 한다.

 

교화되면서도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다. 이름없는 통나무로 누르면 장차 욕심이 없어질 것이니 욕심이 없어져서 고요해지면 천지가 스스로 바르게 된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无名之樸. 鎭之以无名之樸, 夫將不欲, 不欲以靜.

天地將自正.(37) (p869)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른다는 것은 무지무욕의 덕을 보임으로써 백성의 불만을 계몽시킬 것을 주문한다. 노자가 진나라와 관련된 문헌인 것과 통치의 조언을 담은 제왕학임을 알게하는 문장이다.

사실 이름 없는 통나무는 누구의 신하도 아니며 누구를 다스리거나 잘난체를 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무위의 모습이다. 노자라 하면 소위 무위자연으로 통한다. 많은 경우 지친 삶의 피난처나 구속 없는 자유로운 정서 정도의 초월적 삶의 경지 같은 형이상학적인 면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은 통치에 관한 기술’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하는 처세술로서 접근하게 한다.

나는 많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사실 그래서 를 쓴다. 노자를 읽다보니 그가 참으로 시인이었음을 짐작케 된다. 짧은 말로 긴 뜻을 전하려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사실 깊은 뜻은 긴 말보다 짧은 글이 훨씬 풍부한 생각과 감성을 낳는 법이다. 이것이 내가 알게 된 노자. 해설서다보니 너무나 길어진 책을 덮으면서 느낀 점은 이 또한 가두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 열 살이 채 되기 전 군불을 넣으며 오래된 천자문을 한 장씩 찢어서 불쏘시개로 사용했던 적이 있다. 그 책에 나오는 첫 글자들은 하늘 천(), 따 지()였다. 나는 노자()’를 경험하는 중이었나보다. 어린 나는 배움의 흔적을 그렇게 지우고 있었음이다. 내가 책을 덮는 순간 백발의 노인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면 억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