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

살아오면서 겪은 여성혐오의 사례와,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다

꽃쉰 2020. 10. 14. 10:26
일상의 차별과 그로 인한 여성 혐오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 가는 것에 필요한 것은 생물학적 필요와 더불어 사회 환경적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환경이 가지는 역할로 인해 사람은 역할에 따른 젠더의 정체성이 성립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뿌리 깊이 박힌 가부장적 전통으로 인해 남성은 남성으로서의 지배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받았고 여성은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성역할을 부여한 결과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주체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가부장적인 전통이 과연 우리의 전통일까. 가부장적 전통은 조선 중. 후반에 제사 문제와 맞물려 있다. 남녀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 해서 그것이 차별과 핍박의 단초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서로의 책임을 각자 나눔으로써 더욱 견고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조선 중, 후반의 제사 문제는 장남의 역할을 강조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적서 차별과 같은 사회 문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현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일상의 차별과 그로 인한 여성 혐오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Tumisu님의 이미지 입니다.  

 

 

1) 차별은 여성 혐오의 모체

 나는 지방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앞집에 사는 언니는 1980년대를 살면서도 삼단 같은 머리를 길게 땋고 다녔다. 게다가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지만 언니는 늘 식구들 빨래 바구니를 이고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거나 물지게를 지거나 지게에 나뭇짐을 나르기도 했다. 첫째로 태어난 언니는 말 그대로 집안의 살림이었다. 요즘 같았으면 학대로 신고가 들어갔겠지만, 당시엔 그 모든 것이 지극히 정상이었다. (우리가 정상이라 여겼던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던가.) 부모였지만 주인으로 섬겨야 했던 딸이었다. 부모였지만, 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부당한 대우와 편리를 위해 그녀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후에 그 언니가 선을 보고 늦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식장에서 언니가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여겼지만,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우리 집엔 증조모님과 조모님이 계셨고 두 분과 어머니는 모두 내게 같은 말을 자주 하셨다. ‘여자가 되어서...’가 항상 말문에 따라붙었다.. 나는 늘 남동생들과의 차별과 무시에 대한 부당함을 외쳐봤지만 어린 꼬마 여자아이의 목소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삶도 앞집 언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나는 언니와는 다르게 학교를 다녔고 언니보다 영리했고 말을 더 잘했다. 식물은 자랄 때 햇빛을 향해 자란다. 사람도 따뜻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집엔 외딸인 내가 기댈 따뜻한 곳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나는 부단히도 그 마을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차별은 여성 혐오의 모체다. 나는 그 모체를 벗어나고 싶었고 스스로를 결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더 큰 차별의 모선이었다. 나는 우주 속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성의 숫자는 세상의 절반이지만 여성의 인권은 수천 년을 땅 아래 있어서 봄을 기다리는 중인 듯하다.

 

 

 

2) 현대의 성차별과 여성 혐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차별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을까? 물론 Yes!이다. 그러나 차별의 본질을 뽑는 대신 이해라는 이름으로 덮어 가려할 때 혐오의 싹은 더 많은 곳에서 더 크게 자라 EN이나 이윤택 같은 괴물로 성장했다.

현재 진행 중인 ‘미투 운동’은 본질을 흐린다는 명분으로 2차 피해가 난무한다. 그리고 진중하게 따질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보니 ‘남녀 대결구도’로 몰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미투의 본질은 남녀 대결이 아니라 억압당하는 약자가 강자 앞에서 드디어 입을 여는 일이다. 말하자면 강자의 갑질에 을이 대응하는 논리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남성들은 여성의 도발 정도로 인식한다.

SF소설가이자 변호사인 정소연씨가 작성한 글에 의하면 말에 대한 성비 맞추기를 한다고 한다. , 어떤 자리에서든 남녀 간 발언 절대량 1:1을 맞추기 위해 종일 거의 혼자서 6시간을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발언권은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무슨 말을 못하겠다는 식으로 너스레를 떤다. 그 이면에는 여성은 듣고 호응할 것을 요구하는 힘이 강하다는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말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를 버젓이 진리로 내세우는 형국인 것이다. 우리는 말에서 조차도 성비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미투 운동’에서 자신의 일을 밝힐 수 있었던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녀들이 하는 말보다 남성들의 대결구도에 의한 2차 가해적인 댓글들이 주류인 점을 보면서 사라지거나 삼켜진 발언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미투를 외쳤다 하는 그들조차도 실제 사건의 절반의 말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상영했던 영화 <1987>을 보면서 내심 불편한 면이 없지 않았다. 87년도에 나는 고교생이었다. 우리는 날마다 현장에서 잡혀 간 선배들과 구타와 폭행으로 얼룩진 여성들의 비보를 접해야 했다. 그러나 영화 어디에도 아픈 누이들이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남성들로만 이루었단 말인가.

대한민국 육, , 공군을 다 합쳐 장성 이상의 현역 여군은 단 두 명이다. 나라 지킨다는 명분은 남성들만 쌓고 싶은 건지 여군의 절반은 전투임무에 배치되기를 원하지만 남성 간부들은 이를 반대한다. 6.25 전쟁에 여성 500명이 참전했다. 간호장교가 아닌 육, , 공군으로 입대했으나, 생존자는 모두 군에서 쫓겨나야 했다. 군에서 성 군기는 여군을 대상으로 교육한다. 그것은 교통법을 운전자가 아닌 보행자에게 시키는 꼴이다. 계급사회에서 지휘관의 생각은 아랫사람이 따를 수밖에 없다.

IMF 때는 어떠했나, 축 쳐진 아버지들만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던 사회를 보았다. 빚만 떠안기고 집 나간 아버지들을 대신해 어린아이까지 돌보며 밤업소까지 내몰리던 어린 엄마들은 사회적 지탄으로 그들의 목을 더욱 옥죄지 않았던가.

 

 

여성도 국민이다.

두려움은 슬픔조차도 근접하기 힘든 상황으로 내몬다. 연일 ‘미투’ 운동으로 세계가 떠들썩하다. 루스 핼퍼린-카다리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부의장은 여성 문제에 있어 한국을 변화 없는 나라로 평가했다. 최근 한국사회의 ‘미투 운동’에 대한 반격의 일종인 무고죄와 명예훼손죄 언급이 늘어나는 것 역시 한국 고유의 현상이라고 성토했다. 그녀에 말에 따르면 “7년 전 CEDAW에서 지적한 내용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걸 보고 한국 정부에 의지가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했다. 한국사회는 이미 여혐으로 인한 심각한 손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손상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투 운동’으로 인해 자살한 연예인도 있다. 그러나 성폭력으로 인한 자살은 셀 수도 없다. 한 명의 가해자가 죽은 것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펜스 룰을 적용시키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펜스 룰은 남성들의 자기 방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이름의 ‘여성 혐오’라 할 수 있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한 여성이 한 번 경험한 것은 미투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Me only일 뿐이라고 자신의 sns 계정에 올렸다. 모 대학 교수는 안희정 전 도지사를 고소한 피해자의 더 적극적이지 못했던 저항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수많은 피해자가 죽은 일에 대해서는 잊은 지 오래다. 수치와 두려움에 떠는 일은 소리조차 지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적인 권력 앞에 무기력한 한 여성이 감당해야 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조차 받지 못한다. 그 피해 여성은 차라리 깡패나 강도에게 라면 소리라도 지를 수 있었으리라. 권력자에 의한 성폭력은 단순 강압과는 다른 양상을 가진다.

우리가 100명 중 한 명을 떠 올리는 것은 그 하나가 100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남성을 잠재적 피의자로 내몬다거나 마녀사냥이라는 악수까지 언급한다. 그러나 정글의 초식동물들은 맹수의 공격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모든 가정에서 현관문에 23중으로 잠금장치를 한다 해서 이웃들을 잠재적 피의자라 말하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회피의 궤변이 아니라 약자의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2차 가해적인 고소건에 대한 방편도 반드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여성은 수천 년을 참고 이해하며 살아왔다. 개헌안을 들고 또다시 이해를 바란다는 말은 국민의 절반에 대한 무기력을 조장하는 방법이다. 보다 더 적극적인 차별 철폐가 필요해 보인다. 여성도 국민이다.

 

참고자료

 

나무위키, 만물 여혐설

핀치 클럽, 대한민국 여군: 7가지 숫자, 2016.12.21

국민일보, 유엔 정부 성폭력 근절 의지 안보여...” 2018.3.12

조선일보, 여직원에 말 안섞고 톡으로 지시..미투 이후 또 다른 차별, 2018.03.07

동아일보, 또 다른 지옥... “외칠 수 없는 미투” 2018.03.07

헤럴드 경제 미주판, 미투 확산 “피해자를 위해 여혐 합니다?”

중앙일보, 미투 시대 공연계 여혐강펀치 무대 잇따라

연합뉴스, ‘미투’ 초중고교 확산...‘여혐 게시물’ 고발 2018.03.04

SBS, 조민기 자살, 미투 최악의 결과’ 2018.03.09.

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 나의 아가씨, 나의 아줌마 2018.03.23

이미영, 2017. 민주항쟁 30주년에 마주한 ‘여성 혐오’. 『가톨릭 평론』 (2017) 9: 24-34

윤여진. 2015. 미디어 속에 나타난 성 고정관념. 『여성 우리』:13~18

법무부 2013~2016 장애인 대상 성범죄 기소 건수

2012 ‘여군 인권상황 실태조사여군 초점집단 인터뷰 중,

 

*이 글은 2018년도에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