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
파농의 출생
1925년 파농은 마르티니크의 수도 포르도 프랑스에서 태어난다. 포르도 프랑스라는 지명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프랑스령의 카리브해 군도의 작은 섬이다.
유색인으로는 중산층을 이룬 가정에서 자라게 되며 이 작은 식민지 섬의 풍경에 민감했음을 그의 처녀 작품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생생하게 표출된다. 그는 학창시절 세제르를 통해 ‘네그리튀드’‘네그리튀드’ 사상을 접한다. 어린 파농은 세제르에게 길지 않은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평생을 두고 중요한 이정표를 찍은 셈이다. 우리의 삶에서 터닝포인트를 찍는 지점은 양의 문제보다는 질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파리에서 교육 받았다는 것은 당시의 그들에게는 완벽에 가까운 신화적 인물로 바라보았으리라 유추해본다. 세제르의 평판에 이어 어린 학생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파농은 18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형 ‘조비’를 설득하며 친구들과 비시 정부에 반대한 자유 프랑스군에 입대하게 된다. 이 때 그는 군대 내의 차별과 길거리의 멸시와 스스로의 콤플렉스들을 경험하며 상처 입은 검은 영혼의 소유자로 자라 간다.. 완벽한 불어와 지성으로 자신에게 하얀 가면을 완성해 가는 일에 스스로를 독촉했다.
2. 리옹 의대 시절과 저서
종전 후 고향에 돌아가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참전군인을 우대하는 프랑스 정부의 장학금으로 1946년 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이때 그의 누이 ‘가브리엘’은 지원해주면서 자신에게는 한 푼도 도움을 주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하는데 그는 이일을 몹시도 서운하게 여긴 듯하다.. 그는 유색인의 차별까지만 이해한 듯하다.. 사실 이런 자질구레해 보이는 일면에서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지혜 있는 여성이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프랑스에서 파농은 친구와 함께 치과 공부를 하기로 했으나, 만족하지 않고 리옹의 의과대학에 입학을 한다. 전후의 파리는 온갖 인종의 집합소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리옹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많은 젊은이들처럼 파농 또한 멋을 내고 모던에 심취했으며 그들의 우상인 사르트르에 빠져 있었다. 특히 사르트르의 ‘유대인에 대한 성찰’에 심취했으며, 랭스턴 휴즈나 리처드 라이트 같은 미국 흑인 작가들을 흠모했다. 사르트르는 나중에 파농의 마지막 저작인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서문을 써 주게 된다. 이 때 파농은 백혈병을 앓았으며 한 번도 일면식이 없는 사르트르에게 서문을 부탁한다. 사르트르는 드 보부아르와 함께 파농이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 3일을 함께 하며 백혈병도 어쩌지 못하는 그의 열정을 보게 된다.
3.의사 파농
리옹은 마르세유와 가까운 까닭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알제리의 카빌인들이 모였고 농촌에서 소박하게 살던 북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의 도시 노동자가 되면서 신경증을 앓았다. 파농은 이들의 심경에 동화되었고 이로 인해 ‘북아프리카인 징후’를 쓰게 된다. 그리고 리옹의대를 마치면서 작성한 논문은 다시 다듬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으로 출간하게 된다. 수려한 문체도 훌륭하지만, 그가 경험한 상처 입은 자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분석, 지적 소양, 정신의학이 빗어낸 결과, 고전으로 평가받게 된다.
그리고, 그 즈음에 에스파냐 의사 토스켈이 있는 생탈방 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하게 된다. 토스켈은 나중에 회고하기를 ‘파농은 일에 빠져들었다 아니다가 했지만 생탈방에서 그의 손과 목소리는 언제나 공통스러워하는 타자에게 뻗어 있었다’고 한다.
1953년 의사시험을 통과한 파농은 국립기관인 알제리의 블리다-주앵빌 병원에 부임한다. 여기서 그는 투철한 혁명아로 바뀐다. 이 곳에서 그는 기존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혁명적 의사가 되었고 또한 알제리의 비상시국을 겪으며 FLN과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병원은 FLN의 아지트 역할도 감당하게 된다. 결국에는 알제 총독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얼마 뒤 추방당하게 된다. 그 후 그의 본격적인 반식민주의 운동은 ‘엘무자히드’‘엘 무자히드’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알제리의 전쟁을 겪으며 폭력 속에서도 여성과 가정을 사유한다. 알제리전쟁 속에서 히잡은 남성들의 잣대 속에 너울 댈 뿐이다. 억압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민족성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둘 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누가 주체이냐에 대한 구절이 빠져 있으니 그 어느 표현도 옳다 말하기 어렵다. 아랍 남성들은 안보기 위해 여성을 히잡으로 덮으려 했고 유럽 남성은 여성을 보기 위해 히잡을 벗기려 했다. 그러나 여성은 햇빛을 가릴 땐 히잡으로 덮어야 하고 일광욕을 할 땐 히잡을 벗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없다면 히잡은 그냥 남성들의 폭력일 뿐이지 않겠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의 계발을 주도하는 국가가 생겨 났고 우리는 민족문화와 여성 사이의 끈을 가리킨 파농의 관점을 관념만이 아니었다 생각하게 된다.
파농은 어린 시절부터 생각하면 곧 실천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행동하고 움직이는 관념의 시추였다. 한 번 올라가면 강하게 내리 꽂히는 에너지 덩어리였다. 스무살 앳된 청년은 국가와 체제의 차별에도 저항했지만, 자신과 춤을 추지 않는 유럽 여성들에게 더 심각하게 상처 받는 반항아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선호한다는 점을 아직 어린 그는 분석하기도 전에 분노부터 표출했다고 보아진다.
파리로 유학을 준비할 때 만약 그의 어머니가 절대 긍정하며 지지했다면, 혹은 그의 어린 학창시절 자신을 경멸하던 교사가 없었다면 그가 무던히 자신의 자아에 대해 그토록 성장시키려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결핍은 결국 힘이고 에너지다. 파농은 그가 경험한 차별과 경멸 속에서 인종적 갈등과 식민주의에 대한 분노는 철저하게 분석하고 관찰할 수 있었으나 여성에 대한 이해는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차별하는 사람은 차별을 인지 못하거나 양심의 제어를 경험 못하는 경우가 많으나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심각한 상처를 경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강한 인지와 함께 상처의 해결책을 찾거나 분석하고 관찰할 문제의식을 가질 수가 있다. 파농은 본인이 유색인이었으며 식민지령에 살았기에 더욱 감각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여자가 아니다. 여자가 아닌 사람이 여자를 이해하기란,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경험하는 경지에 이르는 일이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파농이 여성에 대해 정확하거나 완벽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다만, 그는 차별의 경험으로 이어진 끈으로 간접적인 이해가 가능했을 것이라 여긴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신의 제자만큼이나 훌륭하다 여겨진다.
나는 유색인종이며 여자다. 아마도 여성은 인류최후의 인종차별로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늘 진실에 가깝다. 숨기고 덮여진 여성들의 희생과 의지와 업적들이 어느 날엔가 빛을 보기를 바란다. 파농의 실천적 의지를 실현함으로써 말이다.
나는 느리지만 꿋꿋하게 내 삶의 지향점을 더듬어 가는 중이다. 내가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경멸과 차별은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봉사로서의 삶이었다. 그래서 겨우 더듬거리며 살아 왔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느릿느릿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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