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으로부터

실수를 통해 성장하는 생각하는 힘

by 꽃쉰 2020. 3. 23.

언젠가 12살쯤이었을 것이다. 집에는 미군용 대야가 하나 있었다. 두툼한 알미늄으로 된 대야였는데 지금 그게 갑자기 생각이 난다. 보통은 금박이 들어간 노란 알미늄 대야가 대부분이었지만 우리집엔 지뢰에 터져도 멀쩡할만큼 튼튼한 은색을 가진 알미늄대야였다. 어찌해서 우리집에 기거하게 된 건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대야는 세숫물을 데우거나 빨래를 삶을 때 사용했고 유용했다.
어느 주말 엄마는 내게 속옷을 삶으라고 했고 나는 당연히 알미늄대야를 사용했다. 석유곤로 위에 빨래를 올리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엄마가 시킨 일 중엔 교회청소도 끼어 있었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서 꾀를 짜 낸게 친구들을 불러다 함께 청소를 마치는 거였다. 자그마한 시골교회는 우리집보다도 작았다.


우리집은 안채와 아래채가 있었고 장독대와 우물이 함께 있으며 장미화단이 있는 마당이 있었지만 교회는 서른 명 남짓 앉으면 꽉 찼고 겨울에 난로라도 설치하면 열댓명만 앉아도 그득했다. 교회는 이 동네 저 동네 아이들이 뭉칠 수 있는 유일한 놀이터쯤 되었다. 나는 아이들과 청소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실컷 놀다 왔다. 그리고 석유곤로 위의 빨래쯤은 쉽게 잊어버렸던 거다.
집에 돌아오니 강력한 알미늄 대야는 멀쩡했으나 빨래는 아주 곱게 재가루가 되어 있었다. 깜짝 놀라고 엄마가 무서웠지만 나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바깥 도로 너머에 재가루를 버리고 알미늄대야를 깨끗하게 씻어뒀다. 대야는 말짱한 얼굴로 엄마를 맞았다. 없어진 빨래를 엄마는 알아채지 못했다. 피곤한 육신으로 귀가했으니 빨래감이 보이지 않는 건 빨래할 일도 없는 것이었고 그렇게 그 순간이 지나갔다. 며칠 뒤 엄마는 없어진 속옷을 두고 내게 질문했으나, 나는 모르겠다고 잡아뗐었다.


그 후로 나는 같은 실수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어릴 땐 다만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으로 그 날의 교훈으로 삼았던 생각이 든다. 그러나 수십년이 흐른 지금 그 일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참 내가 실수를 잘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실수를 통해서 나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 나간 걸 이해했다.
만약 내가 좋은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다면 나는 실수란걸 거의 할 리가 없는 성품이었다. 20대까지만 해도 완벽주의란 소리를 여러 번 들었고 그게 나쁘다 여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고 그러한 환경은 내가 완벽할 수 없도록 쥐어 짰다. 비트는 힘이 강할 수록 내 몸에서는 쉬이 체액이 흐르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어느 순간이 되었을 때, 누군가 울어도 된다는 얘기를 해야 할 만큼 나는 체액을 내 보낼 틈이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실수를 통한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내가 빨래를 태우지 않았다면 나는 그 알미늄대야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없을 것이고 그 대야가 평생처음 그렇게 깨끗하게 목욕재개할 일 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에야 깨닫는 건 실수는 성장을 동반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살면서 무던히도 넘어졋던 기억이 많다. 내 길에는 박힌 돌도 많았고 가시덤불도 수시로 덮쳐왔다. 때론 길이 끊어져 난감했던 경우들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나는 실수를 통해 알게 된 '생각하는 힘'을 마법봉처럼 휘둘러 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법같은 일이 펼쳐졌다. 그것을 두고 누군가는 '긍정의 힘'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는 힘'이라고 하고 싶은데는 이유가 있다.
아들에게 양파를 까는 미션을 준 적이 있다. 아들은 금새 자신은 양파를 깔 줄 모른다는 것이다. 비단 내 아들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하는 힘'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든다. 학업도 마찬가지다. 주입식 교육이 나쁜 것이 아니라 생각없이 듣고만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잘못된 점은 그냥 반항하지말고 들어란 것이다. 이상한 질문 하지말고 정해진 정답같은 질문만 받고 스승의 권위에 반하는 질문은 해서는 안된다.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입식이라 해도 권위를 앞세우지 않는다면 누군가 조용한 수면에 파장을 만들기를 힘들어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생각의 성장을 스스로 이끌어낼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온 세상이 긴장하고 있다. 여기저기 남탓하느라 고민이 많은 걸 본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는 사람은 누구 탓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생각의 힘을 낮추지도 않을 것이다. 귀만 커다란 당나귀가 된 사람들처럼 누군가의 위상을 높이느라 정작 고통받는 사람들을 무시하려 들지도 않을것이다. 자화자찬하며 누군가를 깎아내리느라 말만 앞세우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생각은 나의 실수를 받아들이는 힘이다.
실수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실수를 저지르고도 뒷처리를 하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행동이 나쁜 것이다.
자신이 깬 유리잔은 스스로 치우도록 하자. 누군가가 밟아서 커다란 상처를 입기전에 말이다. 상처입은 자에게 니탓이라 소리치지 좀 말자.


'사진으로부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빛 찬란한 초리골  (0) 2020.04.19
뭘 위한 걸음인가?  (0) 2020.03.24
[이천 산수유마을] 봄날을 걷다  (0) 2020.03.20
까만 밤 푸른 하늘  (0) 2020.03.11
목필화  (0) 2020.03.10

댓글